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논문으로 작성하고도 다윈의 그늘에 가려―다윈의 음모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를 파헤친 책이 여러 권 나와 있다―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과학자 월리스. 그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소개되었다(월리스는 1823년 영국 몬머스셔 주 랜배독에서 태어나 1913년 잉글랜드 도싯 주 브로드셔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2013년이 월리스 서거 100주기였다).
월리스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동물 수집가이자 자연사학자였다. 이 두 가지 정체성이 월리스의 삶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탓에 열네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월리스가 빅토리아 신사들의 취미이던 동물 수집을 위해 표본을 조달한 것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로버트 체임버스의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 찰스 다윈의 『비글 호 항해기』,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탐독하며 자연사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월리스는 여러 면에서 다윈과 대조된다. 다윈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으며 학계에 인맥이 두터웠다. 이에 반해 월리스는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독학으로 과학을 공부했으며 학계의 아웃사이더였다.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일찌감치 생각해내고도 발표를 망설인 것은 잃을 것이 많아서였다. 창조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이를 부정하는 이론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월리스는 종의 기원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자마자 이를 논문으로 써서 다윈에게 보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적 발견의 순수한 기쁨이었다.
사실 월리스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과학자들을 괴롭힌 난제 중의 난제를 해결했으니 이 논문을 학회에서 발표하면 학문적 명성을 떨치고 학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도 경쟁자인 다윈에게 먼저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월리스는 다윈이 종의 기원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오래전에 찾았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월리스의 편지를 받은 다윈은 자신이 쓴 에세이의 요약본과 월리스의 논문을 1858년 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했는데 자신의 순서를 월리스보다 앞에 두었다. 이듬해에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진화론은 ‘다윈주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월리스의 이름은 잊혔다.
하지만 월리스는 자신의 연구가 학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에 흡족해했으며 평생 다윈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윈을 높이 평가하여 『다윈주의』라는 책을 쓰기도 했으며, 다윈 또한 월리스가 만년에 정부 연금을 받도록 애써주었다.
『말레이 제도』는 월리스의 대표작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제도諸島인 말레이 제도의 지리와 생물상을 기술한 연구서이자 유럽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오지를 소개한 여행기다. 최고의 여행기로 손꼽히는 이 책은 1869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 출간되고 있다.
말레이 제도는 지금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에 걸쳐 있으며 25,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제도로, 우리에게는 아직까지도 생소한 곳이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말레이 제도의 자연과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말레이 제도』에서 월리스는 살아 있는 오랑우탄의 행동을 최초로 기록했으며 열대 과일 두리안의 맛과 향기에 대한 유명한 묘사를 남겼다. 야생 상태의 극락조를 최초로 목격한 유럽인도 월리스였다. 월리스날개구리를 비롯하여 새로운 종도 수없이 많이 발견했다. BBC 다큐멘터리 『빌 베일리의 정글 히어로』에서 진행자 빌 베일리는 『말레이 제도』를 들고 월리스의 여정을 따라가는데, 한국 독자 중에도 이 책을 가지고 말레이 제도를 찾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옛날 지명들은 현재 통용되는 지명으로 번역했다.
월리스는 보르네오 섬 사라왁 지방에서 쓴 「새로운 종의 도입을 좌우하는 법칙에 대하여On the Law which has Regulated the Introduction of New Species」라는 논문에서 근연종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가까이 있다고 주장했다(사라왁 법칙). 이는 근연종들이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암시한다. 문제는 환경에 적응하는 변이가 어떻게 해서 종의 변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월리스가 발리 섬에서 롬복 섬으로 건너가는 순간이다. “싱가포르로 곧장 가는 항로를 탈 수 있었다면 결코 두 섬 근처에 가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동양 탐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발견을 놓쳤을 것이다”라는 월리스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발리 섬과 롬복 섬은 너비가 30킬로미터에 불과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동식물의 분포가 전혀 다르다. 월리스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두 섬 사이의 해협이 매우 깊다는 데 착안하여 얕은 바다가 예전에는 육지였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발리 섬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고 롬복 섬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연결되었을 때는 동물이 육지를 통해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육지가 침강하여 섬으로 고립되면서 저마다 진화의 경로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리 섬과 롬복 섬 사이의 해협은 동식물이 건너지 못하는 장벽이었으므로, 이로써 양쪽의 생물상이 전혀 다른 이유가 설명된다. 이 해협을 위로 연장하여 선을 그으면 지구상에서 생물상이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지역을 나눌 수 있는데, 이 선을 ‘월리스 선’이라 한다.
트르나테 섬(또는 할마헤라 섬)에서 월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다가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요인(기근, 전쟁 등)이 동물에게도 작용하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를 솎아낼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다윈이 비둘기와 따개비를 연구하며 통시적 관점에서 진화를 들여다보았다면 월리스는 수많은 동물을 관찰하며 공시적으로 패턴을 발견했다. 특히 곤충의 형태적 변이를 보면서 종의 경계가 뚜렷이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에는 자연선택을 떠올리기까지 월리스가 무엇에 주목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잘 나와 있다.
나의 2016년은 『말레이 제도』로 시작해서 『말레이 제도』로 끝났다. 2014년 8월에 지오북 황영심 대표를 만나 계약서에 서명하고 2015년 11월 11일에 번역을 시작하여 2016년 5월 2일에 최종 원고를 넘겼다. 월리스는 초판 머리말에서 책의 출간이 늦어진 것을 해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독자들은 6년 전에 내 책을 읽어서 지금쯤 싹 잊어버렸을 것에 비하면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147년 만에 『말레이 제도』를 읽게 될 한국 독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
2013년 1월, 런던박물관에서는 다윈의 조각상 옆에 월리스의 초상화를 걸었다. 100년 만에 되찾은 명예였다. 이 책을 통해 한국에서도 월리스의 삶과 업적이 재조명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