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에 넘긴 원고가 늦가을에 책으로 나온다. 연한 초록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던 작업실 창밖 풍경은 누렇고 붉은 잎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봄에 심은 수세미에서 열매가 두 개 열려 며칠 전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빼내 ‘수세미’ 여덟 개를 만들었다. 딸기며 방울토마토며 옥수수며 등등은 수확한 지 이미 오래다. 올해 뿌린 씨앗 중에서 마지막 수확은 이 책이 될 것 같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번역하면서 번역가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번역가의 시간은 2~3개월을 주기로 어떤 의미도 없이 무정하게 반복된다. 이번처럼 책의 시간(번역과 출간)과 자연의 시간(파종과 수확)이 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우연이다. 이 책에도 수많은 우연이 등장한다. 달라이 라마와의 난데없는 인터뷰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마그나손은 이 우연들을 씨줄과 날줄 삼아 촘촘한 이야기의 그물을 짠다. 이 이야기의 무대가 아이슬란드인 것은 가장 큰 우연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장 큰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슬란드에서가 아니라면 결코 쓰일 수 없었을 이야기.
국토의 10퍼센트가 빙하인 나라. 30개의 활화산이 있는 나라.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홉 개의 세계 중에 얼음의 세계 니플헤임과 화염의 세계 무스펠스헤임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에다』의 필사본이 전해지는 나라. 세계 최초의 의회가 열린 나라. 불의 땅, 무엇보다 얼음의 땅, 아이스-란드.
『에다』는 세상의 창조와 멸망, 새로운 시작을 노래한 신화다. 옛 세상의 지배자 오딘, 토르, 로키, 그리고 라그나뢰크로 인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드르. 온 세상을 태워버리는 수르트의 불길은 석유에서 왔을까.
이 책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유럽 신화 『에다』의 창조 이야기, 마치 『에다』의 쌍둥이 같은 『베다』 이야기, 마그나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사회 이야기,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이야기, 외삼촌 존 소르비아르드나르손과 악어의 이야기, 빙하 이야기. 사라진 것들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숫자로 볼 때는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들이 이야기로 들으니 생생하게 다가온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마그나손은 허구의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를 엮어 우리에게 닥친 위기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2011년에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2011)이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핵전쟁이나 기후 위기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졌을 때 미리 비축한 식량과 무기 등으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지침서인데, 작업하는 내내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우울했다. 저렇게 준비해야 할 게 많은데 나는 아무 대책도 없이 암울한 미래를 기다리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책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 뒤로 인류의 멸망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한 번도 번역하지 않았다(물론 내가 거부한 게 아니라 의뢰받은 적이 없어서이지만). 그러다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물질적 소멸이 반드시 의미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소멸 또한 이야기의 한 부분임을, 그리고 우리가 듣고 겪은 이야기는 소멸하지 않을 것임을 상기하면서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 책을 읽게 될 여러분도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