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도덕적 기초』 옮긴이 후기

이언 샤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1992년부터 예일대학교 정치학과에 재직 중이다. 그의 주 관심사는 민주주의와 사회학 연구 방법이다. 특히 학계의 통념과 달리 참여와 대표성이 아니라 지배의 제한 가능성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한다. 샤피로의 사회학 연구는 이론을 전제하고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알맞은 방법을 모색한다. 그의 『민주적 정의Democratic Justice』는 롤스의 『정의론』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작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또한 샤피로는 미국정치·법철학회 연감 《노모스NOMOS》를 8년간 편집하기도 했다.

『정치의 도덕적 기초』는 계몽주의, 반계몽주의, 성숙한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에서 정치 체제의 정당성을 논한다. 계몽주의 기획이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저자는 계몽주의의 핵심인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계약론에서 계몽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저자는 각각의 사상이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그 속에 담긴 핵심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며, 반계몽주의 사조의 공격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두 가치인 진리 추구와 개인 자유를 구현하는 최선의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이성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초기 계몽주의자들의 확신은 오류로 판명 났지만 진리를 추구하되 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는 성숙한 계몽주의의 태도는 종교적·사상적 독단에 대응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민주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집단이 둘 이상 있어서 지배 세력이 민의와 어긋난 독단적 정치를 하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견제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경쟁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때 우리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강의를 토대로 한 만큼 단편적인 생각거리가 많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급진적 재분배론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 ‘계산하다calculate’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밀의 주장을 결과주의적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의도주의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베일에서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조차도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도덕 자의성 논증, 국민 국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당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민주주의에서 영향받는 당사자가 통치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등이 특히 흥미로웠다. 독자들도 책의 기본 줄기를 따라가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

대다수 독자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 중 하나를 신념으로 삼고 있을 것이다. 나는 피터 싱어의 책을 접한 이후로 공리주의가 최선의 접근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책에서 공리주의의 한계와 약점을 조목조목 살펴보면서 나의 신념을 업그레이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신념을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장단점을 인식하는 것은 교과서적 저작의 미덕일 것이다. 이 책은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 그 속에서 일관된 테마를 끄집어내고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번역하면서 애를 먹었다. 다행히 예일대학 강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어 자막과 함께 볼 수 있으니 독자 여러분도 청취하면 이 책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http://oyc.yale.edu/political-science/plsc-118). 이 책은 강의의 입말을 그대로 녹취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했다. 따라서 천천히 꼼꼼히 읽어가며 곱씹기 바란다. 노력하는 만큼 소득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앞둔 지금, 한국에서는 현대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 격변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낳을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국민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독단이 아니라 합의를 추구하고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영향받는 이해당사자들의 요구를 반영해야 한다. 이 책이 새로운 질서의 확립에 한몫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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