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이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테니스 에세이
존 제러마이어 설리번의 서문 수록

차례

서문

‘테니스’는 신기한 단어다. 이 단어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말하자면 테니스라는 경기는 속속들이 프랑스적인데도―프랑스의 초기 국왕 중에 테니스장에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아닌 둘이요, 프랑스 공화국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맺음으로써 탄생하지 않았던가―프랑스인들은 한 번도 ‘테니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죄드폼jeu de paume’, 즉 ‘손바닥 경기’라고, 그럴듯하게 직역하자면 ‘핸드볼’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맨손으로 하다가 이윽고 장갑을 꼈다가 다음에는 주걱을 들었다가 마지막으로 라켓에 정착했다.) 프랑스인은 서브를 할 때 종종 “트네Tenez!”라고 말했다. ‘공이 가니 고개를 드시오’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상대방에게 경고하는 관례가 남아 있는데, 공을 튀기기 전에 무뚝뚝하게 점수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인들이 ‘트네’라고 말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듣고 지레짐작하여 경기 이름을 ‘테네즈ten-ez’로 부르기 시작했다. 유쾌하게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피렌체 사람 하나가 담장이나 출입구에서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그려진다. 초창기 테니스장은 숲에서 나무를 벤 자리에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트네’가 허공에 울려퍼졌을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소설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에서 벤지가 골퍼들이 “캐디!”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자기 누나 말하는 줄 오해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경우는 프랑스에서 출발한 단어가 언어를 넘나들며 귀족 궁정의 초국적 문화를 거쳐 이탈리아에 당도했다는 점이 다를 뿐. 1350년대 즈음에 이 단어는 유럽의 문학에 스며든다. 페트라르카는 《운명의 치유에 관하여De remediis utriusque fortunae》에서 인간의 경험을 무지막지하게 집어삼키는 불안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 원인은 우리 자신의 가벼움과 결벽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이러저리 튕기는 테니스공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하루살이 목숨이요 사사건건 전전긍긍하면서도 어느 해안에 배를 대야 할지 모르는 피조물이로다.”

   테니스공은 존 웹스터의 희곡 《아말피의 여공Duchess of Malfi》에서처럼 인간 실존과 운명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별들이 가지고 노는 정구공일 뿐― 별들 마음대로 치고 받아 넘기고 하는구나.”[《아말피의 여공》(소명출판, 2012), 187쪽] 또 다른 은유에서 테니스는 다른 종류의 ‘가벼움’인 경박함의 상징이 된다. 다 큰 어른이 공을 가지고 놀다니! 테니스를 이런 식으로 써먹은 내력은 헨리 5세 재위기의 일화 하나와 얽혀 있다. 이 강인한 젊은 왕은 한때 셰익스피어의 천방지축 핼 왕자였다. 재위 초기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도팽Dauphin(프랑스의 왕위 계승자_옮긴이)은 헨리 국왕이 그런 유희와 실없는 도락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테니스공을 한 통 보냈다”. 이에 대해 헨리 국왕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했을 법한 대답은 1536년경 (아마도 시인이자 수사 존 리드게이트John Lydgate에 의해) 시로 각색되었다.

딱딱한 테니스공을 가져왔으니
대리석과 쇠를 동그랗게 깎았도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께 맹세하노니
이 공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리로다.

이 이야기는 1599년경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서 2행 연구聯句로 꽃핀다. 도팽이 보낸 꾸러미가 도착하자 헨리의 숙부 엑서터 공작이 선물을 받아든다. 국왕이 묻는다. “숙부, 무슨 보물이오?” 엑서터 공작이 대답한다. “정구공이오.” 헨리가 말한다. “나는 그를 잘 아오.”(이 구절은 이에 못지않게 유명한―전혀 다른 상황에서 나오긴 했지만―“너희 모두 잘 알기에 장난치고 싶은 만큼 기분대로 굴라고 한동안 놔두겠다”[『셰익스피어 전집』(문학과지성사, 2016) 295쪽.]라는 핼의 말에 빗댄 것이다.)

내가 방종하던 그 시절을 조롱하지만
내가 그때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시오.[『셰익스피어 전집』(문학과지성사, 2016) 392쪽.]

셰익스피어의 희곡 《페리클레스》에서는 더 별난 테니스공 은유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테니스장이 바다에 비유된다. (연구자들은 희곡의 이 부분을 조지 윌킨스George Wilkins라는 선술집 주인이 썼으리라 추정한다.) 페리클레스가 반죽음한 채 그리스의 해안에 내동댕이쳐졌다가 어부 세 명에게 발견된다. 그가 말한다.

물과 바람이 넓은 정구장에서
공처럼 갖고 놀다 버린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길 여러분께 부탁하오.[『셰익스피어 전집』(문학과지성사, 2016) 1487쪽.]

요즘 독자 중에는 이 구절을 읽고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토네이도 앨리에서 파생된 스포츠〉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에세이는 미드웨스트 한복판에서 테니스를 배우는 이야기다. 지독한 바람이 그칠 날 없건만 월리스는 해내고 만다. 그가 말하는 한 가지 비결은 “바람과 날씨의 어떤 부당한 처우”로부터도 “기묘한 로봇 같은 초연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테니스에 대해 글을 쓴 것은 삶이 자신에게 테니스를 선사했기 때문이요―그는 주니어 시절에는 수준급 실력이었다―자신의 경험을 가차 없이 작품의 소재로 삼아 나름의 방식으로 ‘방종하던’ 시절을 만들어낸 작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테니스를 소재로 삼을 생각을 하기 전에 테니스가 그에게 찾아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어떤 작가들이 일찌감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고 자신의 삶을 일종의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테니스가 문학적 유형과 목적에 안성맞춤인 스포츠임을 월리스가 진작에 알아차렸다고 상상하는 것도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테니스는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긴다. 테니스는 아마도 가장 고독한 경기일 것이다. 권투조차 코너가 있지만, 프로 테니스에서는 코치가 점잖은 격려 이상의 말을 건네면 규칙 위반이며 관중은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침묵을 지켜야 한다. 상대 선수는 멀찍이 있거나, 가까이 있을 때는 무심한 듯 적대적이다. 테니스와 가장 가까운 경기는 오프라인 체스인지도 모르겠다. 본질적으로 수학적인 문제를 공략하느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그런 체스 말이다. 그래서 좋은 경기는 작가뿐 아니라 철학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월리스에게는 퍼펙트 게임이었다.

   그는 소설, 에세이, 기사, 서평에서 테니스에 대해 썼으며 테니스는 표면상 그의 가장 일관된 테마였다. 월리스는 자신의 테니스 사랑에 대해,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테니스의 연관성에 대해 의도했든 아니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테니스에 대한 현대 문헌들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 청년이던 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촉망받는 파워 베이스라이너로, 코치가 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마리야 샤라포바가 두 차례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한몫했다)를 다룬 1996년 〈에스콰이어〉 기사 첫머리에서 월리스는 물리학과 신체적 요소를 꼼꼼히 조명하여 글에 활력을 불어넣었는데, 이는 존 맥피의 《경기의 수준Levels of the Game(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책 못지않게 기쁨을 주는 몇 안 되는 테니스 책 중 하나) 처음 몇 행을 떠올리게 한다. “아서 애시는 발을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테니스공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다. 토스는 높이 전방으로 향한다. 저 공에 낙하가 허용된다면 애시 말마따나 ‘포물선을 그릴’ 것이다.”

   내가 보기에, 테니스를 테마로 삼은 월리스의 논픽션이 주는 누적적 효과는 거울을 비추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그것은 겹눈처럼 생긴 거울을 공간에 설치하여 위치를 잡았을 때의 효과다. 월리스의 거울이 작가의 마음을 향해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그가 서술하는 경기는 언어와 같아서 닫힌 계를 강조하고 물신화한다(“아웃!”). 그는 테니스의 규칙, 테니스의 무정함에 환희하고 매혹된다. 테니스를 사랑하되 초월하기를 갈망한다. 월리스의 글이 다 그렇듯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그의 테니스 에세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철학자다. 실재는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이며―“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언어는 놀이와 불가분의 관계임을―둘 다 근본적으로는 “활동, 일종의 삶의 일환”이다―우리에게 알려준 비트겐슈타인 말이다.

   이렇게 묘사하면 독자는 저 작가가 무미건조하고 추상적이며 결국 테니스를 편의적이고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에게 더 중요한) 딴 얘기를 할 뿐이라고 결론 내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이 좀 있다 만나게 될 작가는 그런 위인이 아니다. 아니, 그는 코트 위의 감각을 산문으로 옮길 수 있는 인물이다. 바람 잘 날 없는 동네에서 자라면서 어떤 테니스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덕에 자기보다 재능 많은 상대를 이겨 뜻밖의 결과로 그를 낙담시킬 수 있었는지 묘사하는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투수처럼 침을 뱉어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바람이 만나는 곳으로 커브를 때려 공을 아슬아슬하게 인에 떨어뜨렸다. 스핀을 잔뜩 먹인 나의 특제 바람 서브를 넣으면 공은 공중에서 달걀 모양이 되어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었다].” 트레이시 오스틴의 자서전을 비평하면서는, 그녀의 책에 실망했다고 말하면서도 운동에서의 위대함과 평범함에 대해, 둘의 진짜 차이점에 대해 언급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선수로서 곧잘 “분열되고 마비되었”음을 떠올린다. “위대하지 않은 운동선수들은 대체로 그런다. 얼어붙은 채 숨이 막히는 것. 초점을 잃는 것. 자신을 의식하는 것.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동작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하는 것.” 이에 반해 위대한 선수가 그렇게 되는 한 가지 이유는 “온전히 몰두하”지 못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예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눈멀고 귀먹”는 것은 “재능의 대가”가 아니라 “재능의 본질”이요, 심지어 재능 자체다. 반면에 작가는 성찰 안에서만 존재하기에 존재를 통틀어 그러한 지고의 영역으로부터 가장 동떨어져 있다.

   월리스의 테니스 에세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아마도 최상의―것은 2006년 〈타임스〉의 단명한 스포츠 잡지 〈플레이〉에 처음 발표된 〈살과 빛의 몸을 입은 페더러〉다. 자기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테니스 작가가 자기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테니스 선수에 대해 글을 썼다. 이 문장에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랴. 페더러는 훗날 한 포럼에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월리스와 “ATP(프로테니스협회Association of Tennis Professionals) 사무실에서 고작 20분”만 있었는데도 그가 그토록 “포괄적인” 글을 써낸 것에 놀랐다고. 하지만 월리스가 대면 시간을 더 오래 갖고 싶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윔블던에 온 것은 로저 페더러라는 인물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페더러가 경기 중에 어떤 존재로 바뀌는지 보고 싶어서였으니까. 월리스가 보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스펙터클’로만 존재했다. 이를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페더러 에세이를 그가 정확히 10년 전에 마이클 조이스에 대해 쓴 인물평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예전 에세이의 두텁고 섬세한 묘사를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나중 에세이가 대단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조이스 에세이에서 월리스는 무명씨에 대해,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자 투어에서 결코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썼다. 그것이 그 에세이의 서브텍스트였으며 가끔은 텍스트 자체이기도 했다. ‘그토록’ 훌륭하면서도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 에세이의 주제는 고뇌였다. 하지만 페더러 에세이의 주인공은 월리스에게 다른 주제를 던졌다. 그것은 ‘초월’, 초월의 실제 모습이었다. “몇몇 물리 법칙으로부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면제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수 말이다. 월리스가 그토록 아름답게 분석하는 포인트―“열여섯 스트로크의 포인트”는 전투 장면처럼 극적으로 읽힌다―의 주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하다. 이 장면은 페더러의 2006년 윔블던 당시 라파엘 나달과의 결승전 2세트에서 연출되었다. 베이스라인으로부터 약 1촌 안쪽에서 일종의 미친 스핀을 먹여 때려내어 공이 네트를 ‘미끄러져’ 넘어가 사라져버리게 한, 영상을 아무리 다시 돌려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백핸드로 경기를 끝낸 포인트 말이다. 나달은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월리스는 우리에게 그 순간을 선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을 만들어낸 전략적·기하학적 지능과, 샷 선택으로 상대 선수를 ‘최면’에 빠뜨리는 페더러의 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 생각에 페더러 에세이의 핵심 문장은 ‘진화’를 언급하는 문단에 들어 있다. 현대 테니스 경기를 정의한 ‘파워 베이스라인’ 스타일―강타자 두 명이 멀찍이 물러선 채 손목이 빠개져라 그라운드스트로크를 때리는 것―을 묘사하면서 월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워 베이스라인 스타일은] 평론가들이 오래전부터 대놓고 우려한 테니스의 진화적 종점은 아니다. 이것이 참임을 입증한 선수가 바로 로저 페더러다.” 그가 이 문장을 쓴 것은 거의 감사에 가까운 행위 아닐까. 파워 게임의 난폭한 독재를 무너뜨리고 올코트 스타일을, 예술을 되살리는 일은 천재성을 필요로 했다. 월리스가 강조하듯 페더러는 이 일을 파워 게임 ‘내부에서’, 허리케인의 위력으로 날아오는 샷을 받아치면서 해냈다. 현대 테니스의 풍동風洞 안에서 그는, 나비를 위해 만든 것처럼 보이면서도 무지막지하게 효과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진화적 종점에 이르렀다고 (언제나처럼?) 간주되는 형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이와 비슷하게 자신의 정점에서 새로운 길을 보여준 예술가인 21세기 소설가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 주제이자 인물인가.

이 글을 끝맺으면서―아니, 옆으로 비킨다고 해야 옳겠지만―월리스가 대부분의 테니스 경기를 치른 일리노이주 섐페인어배나의 지방 신문 〈뉴스 가제트News Gazette〉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모든 선수는 코트 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 안다. 코트에서는 선수들의 성격이 무자비한 엑스선에 낱낱이 까발려진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아래의 짧은 세 문단은 의미심장하며 월리스 자료실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할 만하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2008년 자살하고 오래지 않아 그의 어배나 고등학교 테니스 팀 동료 몇몇이 바로 이곳 그의 고향에서 그를 기리기로 마음먹었다.
월리스는 빼어난 테니스 선수였기에 릭 골드워서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은 명판을 달거나 그의 이름을 딴 테니스장을 지어 그를 기념하기에는 블레어 공원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기념 사업을 주도하는 골드워서가 말한다. “그는 테니스에 무척 열정적이었으며 그곳에서 경기에 참가하고 [두 번의 여름] 테니스 강습을 진행했습니다.”

―월리스가 3학년이던 1980년 어배나 고등학교 《로즈메리Rosemary》 졸업 앨범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월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