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시덴탈리스트

장용민, 『신의 달력』 서평

노승영

번역 중인 책에 『공산당 선언』이 인용되었기에 대출하려고 도서관에 갔다. 밀도 높은 개론서를 번역하고 있어서 온종일 골치를 썩이던 차라 하루 일과 끝나고 머리 좀 식힐 요량으로 소설 코너를 찾았는데, 구석에 표지가 떨어져 나간 채 너덜너덜해진 책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차피 표지가 없으니 무단 반출로 걸리지는 않겠지 싶어 가방에 넣어 가져왔다. 심장이 콩닥콩닥 하는 기분 오랜만이었다. 책은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었는데 대단한 페이지 터너였다. 처음부터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져 눈길을 사로잡더니 매 장마다 떡밥을 던지며 판을 키운다. 이 모든 갈등과 복선을 어떻게 수습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주인공 이름은 하워드. 딸이 납치되어 살해당한 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다 엄청난 역사적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은 너무나 엄청난데,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스포일러가 될 만큼 황당하다. 저자는 잔뜩 벌려놓은 복선을 수습하지 않고 독자와 함께 자폭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래, 이해할 만하다. 시대적 배경이 마야 달력에서 말하는 세계의 종말인 2012년 아닌가.

어쨌든 이 책의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고 담당 편집위원에게 얘기했는데, 그는 내가 외국 소설의 서평을 쓰기로 되어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나는 이 책이 한국어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미국인 것으로 보아 미국 소설의 번역서일 것이라고 강변했다. 게다가 설령 애초에 한국어로 썼다고 해서 한국 소설로 분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글이 창제되고 보급되기 전에 쓴 한문 소설은 한국 소설이 아니라 중국 소설인가? 그러고 보니 선조들이 쓴 한문은 한국어를 표현하는 문자였을까, 중국어를 표현하는 문자였을까? 아니면 한문이라는 제3의 언어가 있었다고 봐야 할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한국 문학’을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의 문학. 한국의 고전 문학부터 현대 문학까지 모두 포괄한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이 ‘한국의 문학’이면 세계 문학은 ‘세계의 문학’이란 말인가?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세계 문학’의 세 번째 풀이는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 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정의를 가지고 한국 문학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한국문학강의』(길벗, 2015)의 정의를 쓰도록 하자. “한국 문학은 한국인 작자가 한국인 수용자를 상대로 한국어로 창작한 문학이다.” (내게 묻는다면, 한국 에이전시가 관리하면 한국 문학, 외국 에이전시가 관리하면 외국 문학이라고 대답했겠지만.)

나는 이 책이 외국 소설의 번역서라는 증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기준은 문체가 번역투인가다. 외국어를 번역한 글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다. 바로 이런 문장.

“돈이 넘치는 곳이라서 그런지 너그럽군.”
하워드가 콜라 하나를 꺼내며 중얼댔다.
신기원 박사가 나타난 것은 자판기에 있던 음료수를 거의 종류별로 마시고 난 무렵이었다. 그는 청바지 차림에 큼직한 헤드폰을 끼고 있었는데 ……(2권 64~65쪽)

시점의 이동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순서는 ‘하워드 → 콜라 → 다 마시다 → 신기원 박사 → 청바지와 헤드폰’이지만 정작 위 문장은 ‘하워드 → 콜라 → 신기원 박사 → 다 마시다 → 청바지와 헤드폰’으로 순서가 바뀌었다. 필시 “He [Howard] had tried almost all sorts of beverages in the vending machine, when Dr. New Epoch came in.” 정도의 문장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영어는 ‘bring’이나 ‘cause’ 같은 동사로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서 ‘A가 B를 야기했다’ 같은 명사화 구문을 많이 쓰며 무생물 주어 구문도 곧잘 쓴다. 한국어에서는 생략되는 인칭대명사도 자리를 채우기 위해 뻔질나게 등장한다.

두 번째 기준은 어휘가 빈약한가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대부분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를 쓰게 되는데, 고유어를 비롯하여 영한사전에 없는 풀이말이 많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에서는 영한사전에 없는 풀이말을 품사별로 정리해두었는데, 내가 번역할 때는 한 번도 쓰지 않은 단어가 많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워드가 움찔 물러서며 너스레를 떨었다.”라는 문장의 ‘너스레’는 영한사전에서 풀이말로 쓰이지 않는 단어다. 영한사전에서 ‘chatty’나 ‘talkative’를 찾으면 ‘수다스러운, 재잘거리는’ 정도로 풀이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번역이 아니라 애초에 한국어로 쓴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째 기준은 대화문에서 ‘…가 말했다’의 위치다. 영어는 대화를 둘로 나누고 중간에 ‘…가 말했다’를 넣거나(이를테면 “I'm sure I'm not Ada," she said, "for her hair goes in such long ringlets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인용) 대화문 뒤에 넣는 경우가 많다(이를테면 “I'm sure those are not right words," said poor Alice, ……” 같은 책에서 인용). 그래서 영어를 번역했다면 ‘…가 말했다’가 주로 대화문 중간이나 끝에 온다. 이에 반해 한국어는 ‘…라고 말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가 말했다’가 주로 대화문 앞에 온다. 이 책은, 뒤에 온다.

“대령님, 이쯤에서 캠프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들 몹시 지쳤습니다.” 장비를 담당하는 보우어 상사가 다가와 말했다.(1권 9쪽)

네 번째 기준은 문화적 차이다. 이를테면 1권 139쪽에서는 악당이 ‘볼러해트’를 썼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영어 ‘bowler hat’는 한국어로 ‘중산모(자)’를 일컫는다. 물론 번역서일 경우에도 ‘중산모’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한국어로 썼다면 ‘중산모’라는 쉬운 단어를 놔두고 굳이 ‘볼러해트’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그 밖에도 1권 59쪽의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라는 문장은 애초에 한국어로 썼다면 ‘한 장의 편지’가 아니라 ‘편지 한 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이 책을 번역서로 결론 내리고 서평을 쓰기 시작했는데, 2권 162쪽과 163쪽 사이에 꽂힌 책갈피가 뭔가 이상했다. 마치 책날개를 잘라 만든 것 같았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 종말론과 기독교의 가려진 부분들,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한데 엮어 거대한 미스터리를 구성해낸 작가의 담대한 상상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구상 단계에서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진행되었다.” 종말론과 기독교는 이 책의 두 축 아닌가.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이 책이 외국 소설처럼 보인 것은 영미권 독자들에게 자기네 소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어식 표현도 납득이 된다. 이렇게 써야 영어로 번역할 때 의미 손실이 최소화될 테니 말이다. ‘…가 말했다’가 대화문 뒤에 온 것도 영어로 번역하기 쉽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90쪽의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젠장.”은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국을 배경으로 쓴 한국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전 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거나 외국의 문물을 소재로 삼은 책을 읽고 싶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외국 소설을 원서로 읽거나 번역서를 읽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 독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한국 소설가라면 외국 이야기를 써도 한국 독자가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 물론 하워드를 철수로 바꾸고 볼티모어를 대구로 바꾸었을 때 영락없는 한국 소설이 되어버린다면 반칙이겠지만, 이 책은 기독교를 비롯하여 서양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삼았기에 외국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내가 2012년 종말론에 관심이 있어서 이 주제로 나온 소설을 읽고 싶다고 해보자. 많은 외국 소설과 이 책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고르겠다. 외국 소설의 수용 방식은 번안에서 번역으로, 급기야 창작으로 진화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이 취하는 시점이다. 이 책은 여행기와 달리 한국인의 시점에서 세계를 보지 않는다.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대하는 서양의 태도를 일컫는다면, 이 책을 그 반대인 악시덴탈리즘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서양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인 것’이다. 서양을 소재로 한 한국 소설이 아니라 그냥 외국 소설의 번역서로 읽힌다는 얘기다. 그래서 ‘너스레’나 ‘가는 날이 장날’ 같은 표현이 오히려 어색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외국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데 걸림돌일까? 이 책에서 다루는 온갖 음모론적 지식들은 대부분 텍스트로만 존재한다. 즉, 미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그 지식에 접근하는 수준은 비슷하다. 지식에는 국경이 없으니까(물론 언어 장벽은 있겠지만). 그런데 왜 한국 저자는 대부분 한국 얘기만 쓸까? 그것은 한국인의 시점을 아예 배제할 경우 진품성authenticity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고유명사만 외국 것으로 바꾼 책은 틀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외국의 ‘사실들’을 다루는 책은 오류의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이때의 오류는 완벽함의 예외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의 증거로 치부될 우려가 있다. 아마도 한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후기: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나 편집위원과의 대화는 전부 허구다. 번역투 등의 문제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인터넷에서 저자 인터뷰를 읽었는데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1권 번역을 끝내서, 에이전트분이 해외 출판을 시도하는 중이에요.” 인터뷰 날짜는 2012년 5월 10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마야의 달력 졸킨에 따른 세계 종말의 날, 그리고 작중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가는 날은 2012년 12월 21일이었다. 날짜를 못박아 종말론적 상상을 펼친 소설이 출간 시기를 놓치는 것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출처: 《악스트》 2015년 9~10월 호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