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과 해도 되는 것

메리 W. 셸리, 『프랑켄슈타인』 서평

노승영

(이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can’에는 ‘할 수 있다’(능력)와 ‘해도 된다’(허가)의 두 가지 뜻이 있다. 후자의 뜻으로는 ‘may’를 써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은 ‘허가’의 뜻으로도 ‘can’이 훨씬 많이 쓰이는 듯하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이 언어 현상과 묘하게 일치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미개인을 죽일 수 있으면 죽여도 되고, 우주를 탐사할 수 있으면 탐사해도 되고,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조작할 수 있으면 조작해도 되고,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한 것처럼) 죽은 자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불어넣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해도 되는 것의 한계를 법과 윤리가 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인위적 한계가 없는 곳에서는 가능성의 한계가 곧 허용의 한계다. 심지어 앎의 탐구라는 미명하에 법적·윤리적 한계까지 과감히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가능성의 한계를 넘는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이 부과될까? 아무런 책임도 부과되지 않는다. 가능성의 한계를 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 이 결과가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유익할지 해로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결과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가뿐이다. 물론 연구자가 이런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는 않겠지만 자금을 대는 기업은 연구의 과실을 독점적으로 누리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법적·윤리적 제약을 뛰어넘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자, 그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프랑켄슈타인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창조한 생명에 대한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에 대한 책임이다. 피조물에 대한 책임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명명의 책임이다. 야훼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생명을 얻은 피조물을 처음 본 순간 프랑켄슈타인은 …… 달아났다. “그때, 창의 미늘 덧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스름한 노란 달빛 속에서 나는 그 추잡한 것, 내가 창조해 낸 끔찍한 괴물을 보았다. …… 날 잡으려는 듯 한 손이 뻗쳐 왔지만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와 아래층으로 달아났다.” 훗날 동생을 죽인 피조물과 대면했을 때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이 악마야, 어딜 감히 나한테 다가오느냐? …… 가증스러운 괴물 같으니!”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의 책임을 저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악마’이자 ‘괴물’이 영영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잘못 부른 영화들의 영향이겠지만, 피조물 자신은 여기에 만족했을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하니 말이다. “당신의 일기를 통해 당신이 내 아버지, 창조자임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이 서평에서는 그를 ‘프랑켄슈타인 2세’(약칭 프주)로 부르도록 하겠다.

프랑켄슈타인은 인류에 대한 책임도 저버렸다. 물론 갓 창조되었을 때의 프주는 겉모습과 달리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아기와 같은 상태였다. “내 존재의 출발점을 떠올리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오. 당시 일들은 모두 혼란스럽고 분명하지도 않소. 이상하게 중첩된 감각들 때문에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 맡은 행위가 뒤섞여 일어났소. 사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양한 감각 작용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소. 서서히, 강렬해지는 빛이 점차 내 신경을 압박하는 바람에 눈을 감아야 했던 기억이 나오. 그 다음엔 어둠이 밀려와 혼란스러웠소.” 하지만 자신을 만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자신을 공격하는 등의 일을 겪고,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매 맞고 쫓겨나면서 프주는 분노와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프주의 외모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잘 기르고 가르쳤다면 프주는 사회에서 배척받을지언정 괴물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이 프주를 버리고 달아난 대가로 동생 윌리엄, 하녀 저스틴 모리츠, 친구 앙리 클레르발, 아내 엘리자베스 라벤차, 아버지 알폰스 프랑켄슈타인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현대의 과학자들이 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것은 아니며, 저스틴 모리츠의 죽음에서 보듯 프랑켄슈타인은 남달리 비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윌리엄이 목 졸려 죽은 뒤에 저스틴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윌리엄이 목에 걸고 있던 어머니의 초상화 목걸이가 저스틴의 옷 주머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나중에 밝혀진바 목걸이는 프주가 윌리엄을 살해한 뒤에 몰래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은 프주가 진범임을 확신하면서도 저스틴의 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안한다. ‘실제로 창조자인 나를 제외하고서, 직접 확인하지 않는 한 내 추정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와 그렇게 경솔하게 그를 세상에 내보낸 나의 무지를 믿을 사람이 있을까? …… 나는 저스틴에게 씌워진 죄를 지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몇천 번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던 때 나는 이곳에 없었고, 또 그런 자백을 한들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만 여겨질 것이고 나로 인해 고통 받는 그녀가 풀려나지도 않을 것이다.’ 정황 증거만 있으면 파문과 지옥불을 무기로 얼마든지 거짓 자백을 받아낼 수 있는 당시의 사법 현실을 정녕 몰랐단 말인가?

아내 엘리자베스가 살해된 이유는 더 기막히다. 프주는 프랑켄슈타인에게 “네 결혼 첫날밤에 찾아갈 것이다”라고 경고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결혼 첫날밤에 프주가 (아내가 아니라)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채 엘리자베스를 방에 들이고 자신은 밖에서 권총을 들고 감시한다. 그런데 프주가 이렇게 경고한 데는 사연이 있다. 프주는 자신을 닮은 배필을 만들어달라고 프랑켄슈타인에게 부탁했다. 인간은 모두 프주 자신의 외모를 혐오하니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여자 ‘괴물’을 만들어 둘이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문명 세상을 떠나 단둘이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약속을 받아들여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의 외딴 섬에서 제2의 창조 작업에 몰두하나 마지막 단계에서 충동적으로 재료를 갈갈이 찢어버린다. (영문을 모르겠다면 이것 하나만 생각해보시길. 프주와 여자 프주가 결혼하면 어떤 결실을 맺을까?) 이런 상황에서 프주의 복수는 어때야 할까?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신부를 죽였으니 자신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죽여야 아귀가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간단한 추리도 하지 못한 프랑켄슈타인은 아내를 무방비 상태로 방치했고, 그녀는 프주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생명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외계 지성체 탐사 등 수많은 가능성이 인류 앞에 놓여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연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지 않았다.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예시로서 모든 인과 과정의 순간순간을 중단시켜 검토하고 분석하다 보니, 마침내 그 암흑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러운 빛이 내게 쏟아졌다. …… 생명이 없는 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 그처럼 경이로운 능력이 나에게 주어지자, 나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구현할 것인가였다. 프랑켄슈타인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곧 ‘해도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를까?


출처: 《악스트》 2015년 11~12월 호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