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 북쪽에 있는 마을 고노기의 터줏대감 가나하시 가家에 경사가 났다. 마을의 수호신 시로코 님의 신사神社를 모신 뒤로 뎃포미즈(폭우로 인한 물난리)가 사라져 산을 개간하고 목재를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게 되고서 마을이 번창하자 도베 님이 하인들에게 말을 선물로 내놓은 것이다. 다이바(말을 괴롭히는 요괴)에게 당한 적 없는 말 열한 마리를 마구간에서 꺼내어 가신家臣 도미한 님에게는 2분의 1을, 에도의 분가分家 가나이야의 대행수 후사고로에게는 4분의 1을, 마구간지기의 아들 헤이타에게는 6분의 1을 하사했다. 열한 마리를 어떻게 절반으로 나눈단 말인가. 그때, 지진으로 자신의 신사를 잃고 사당에 갇혀버린 시로코 님이―이제는 이름도 오히데리 씨로 바뀌었다―‘하야’라는 말을 한 마리 데리고 나타났다. 오히데리 씨는 자신의 말을 빌려줄 테니 말을 다시 배분해보라고 말했다. 이제 열두 마리가 된 말에서 2분의 1인 여섯 마리를 도미한 님에게, 4분의 1인 세 마리를 후사고로에게, 6분의 1인 두 마리를 헤이타에게 주고 나니 하야 한 마리가 남았다. 오히데리 씨는, 하야는 본디 자신의 말이니 다시 데려가겠다며 말고삐를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가카에이레(고부신이라는 무사를 모시는 지위) 가도 신자에몬이 아내 하쓰네와 함께 고이시카와의 빈 저택(일명 수국 저택)에 입주했다. 신자에몬은 서책을 좋아하여 희귀한 유교 경전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학자軍學者를 자처하는 이야기꾼 모로호시 지카라가 서책을 탐내어 신자에몬을 졸랐다. 결국 신자에몬은 자신이 아끼는 서책 열한 권을 방출하기로 마음먹고 모로호시에게 2분의 1을, 자신의 습자소에서 작은 선생 노릇을 하는 무사 오오노 리이치로에게 3분의 1을, 아버지를 잃고 작은아버지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 나오타로에게 6분의 1을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열한 권을 어떻게 절반으로 나눈단 말인가. 그때 수국 저택에 깃들어 사는 안주暗獸(마물의 일종으로, 시커먼 덩어리처럼 생겼으며 빛을 싫어한다) 구로스케가 신자에몬의 미모록尾毛錄을 가지고 나타났다. 오히데리 씨의 지혜로운 조언을 전해 들은 구로스케는 자신도 상생의 도움을 베풀고 싶어서, 미모록을 빌려줄 테니 서책을 다시 배분해보라고 말했다. 이제 열두 권이 된 책에서 2분의 1인 여섯 권을 모로호시에게, 3분의 1인 네 권을 리이치로에게, 6분의 1인 두 권을 나오타로에게 주고 나니 아귀가 딱 맞았다. 은혜를 베풀려다 졸지에 책을 잃은 구로스케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툇마루 밑으로 숨어들었다.
깊은 산골 마을 다테나리에는 고신지라는 절이 있는데 주지 가쿠넨은 야카타 님(마을을 다스리는 직책) 역할을 사실상 대행하고 있었다. 총잡이 출신 이노스케 할아버지는 배에 종양이 있어서 세상 하직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우연히 부처님 형상이 그려진 장작개비를 집에 두었다가 이튿날 말끔히 나았다. 마을 사람들은 주지 가쿠넨에게 목불木佛님을 나눠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가쿠넨은 장작개비 열한 개를 내어주면서 촌장 한조에게 2분의 1을, 이노스케에게 4분의 1을, 사이비 승려 교넨보에게 12분의 1을 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열한 개를 어떻게 절반으로 나눈단 말인가. 그때, 마을 사람들의 눈 밖에 나서 산속 오두막에 갇혀 지내던 도미이치가 장작개비 부처님을 하나 가지고 나타났다. 이 부처님만 있으면 마을에 웃음꽃이 필 것이라고 장담했다. 고노기와 수국 저택의 사연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도미이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밑져야 본전이요, 손해 보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열두 개가 된 장작개비에서 2분의 1인 여섯 개를 한조에게, 4분의 1인 세 개를 이노스케에게, 12분의 1인 한 개를 교넨보에게 나누어주니 두 개가 남았다. 도미이치는 두 개 중 하나는 원래 자신의 것이니 도로 가져갈 것이고 나머지 하나도 마을 사람들은 가질 자격이 없으니 자신이 가져가겠다며 목불을 가지고 산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본디 ‘열여덟 번째 낙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우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아랍의 상인이 낙타 열일곱 마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각각 2분의 1, 3분의 1, 9분의 1을 가지도록 했는데, 살아 있는 낙타를 자를 수 없어 골머리를 썩이던 차에 귀인이 낙타 한 마리를 빌려주어 유언대로 나누고 나머지 한 마리를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큰애가 가지고 있는 『수학도둑』(서울문화사, 2009)을 참고했는데, 이 책 122~129쪽에는 사비트라마 장군이 군만두 열한 개를 2분의 1, 4분의 1, 6분의 1로 나누어 먹는 얘기로 각색되어 있었다.)
여기서 낙타는 ‘없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만으로 존재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괴도 그 존재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설명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기쁘게나 슬프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안주』에 등장하는 요괴는 성격이 각기 다르다. 헤이타의 몸에 들어간 오히데리 씨는 사연이 해결된 뒤에도 헤이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지켜준다. 후사고로가 헤이타를 학대하자 뱀으로 둔갑해 삼켜버린 적도 있다. 물론 헤이타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결국은 헤어질 테지만. 어릴 적에는 다들 누군가 (보이지는 않아도) 내 곁에 머물면서 나를 지켜준다고 상상하지 않았던가.
그런가 하면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요괴도 있다. 안주 구로스케는 외로움이 사무쳐 요괴가 되었으나 막상 인간의 손이 닿으면 몸이 상한다. 신자에몬의 아내 하쓰네가 나무상자에 맞아 다칠 위험에 처했을 때 구로스케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하쓰네를 구하지만 자기 몸의 일부를 잃고 만다. 외로움과 동거는 공존할 수 없는 법. 구로스케를 위해 신자에몬 부부는 집을 떠나고, 구로스케는 외로움 대신 그리움을 품은 채 빈집을 홀로 지킨다.
마지막으로, 도미이치는 본디 인간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학대에 아내와 아이를 잃고서 원한이 사무쳐 마물이 된다. 목불은 마을을 파괴하기 위해 도미이치가 던진 미끼였다. 주지 가쿠넨의 사주를 받아 도미이치를 가둔 마을 사람들은 그의 목불이 영험을 발휘하자 오히려 그를 부처로 떠받든다. 하지만 그가 내민 선물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이 장면이 하도 오싹해서 결코 다시 읽고 싶지 않았는데 서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춰보았으니 오늘 밤도 악몽에 시달리게 생겼다.
(책의 제목이 ‘안주’여서 처음에는 요리에 대한 책인 줄 알았다. 수국 저택에 사는 안주의 이름 ‘구로스케’는 ‘검다’를 뜻하는 ‘구로くろ’와 인명을 나타내는 접미사 ‘스케すけ’가 합쳐진 파생어인데, 한국어로는 ‘검돌이’나 ‘검순이’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이황림 감독의 영화 『깜보』에서 장두이가 분한 깜보, 아니면 ‘검둥이’나 ‘깜둥이’는 어떨까? 깜깜한 밤에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데, 그 형체의 정체가 안주라고 상상하면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출처: 《악스트》 2016년 1~2월 호 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