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판타지라 부르지 못하고

케이트 해리슨, 『소울 비치』 서평

노승영

판타지인 줄 알고 펼쳐 든 책이 알고 보니 스릴러라면? 범인이 궁금해서 쉬지 않고 끝까지 읽고 보니 단권이 아니라 시리즈의 1권이라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권이 나오지 않는다면?

2012년에 『소울 비치』를 구입하여 완독한 독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소울 비치』 한국어판 1권은 2012년 4월 6일에 출간되었는데, 2권과 3권은 3년이 지난 2015년 3월 31일에 나란히 출간되었다(영어판은 2011년 9월 1일, 2013년 8월 1일, 2014년 7월 3일에 출간되었다). 세 권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그 3년 동안 독자들의 사리가 쌓이고 쌓여 소울 비치Soul Beach의 조약돌로 깔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장르 소설을 사전 정보 없이 읽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하지만 ‘소울 비치: 상처받은 영혼들의 파라다이스’라는 제목에서 대체 어떤 장르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저자 케이트 해리슨의 책 중에서 국내 출간된 것은 간헐적 단식으로 살을 뺀 이야기인 『5:2 다이어트』뿐이었는데, 이 책이 하이틴 로맨스라는 것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이 책은 판타지로 시작하여 스릴러를 표방하다가 로맨스로 끝난다. 미리 알았다면 이 책을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시리즈 세 권을 한꺼번에 구입한 것은 사별의 상처를 판타지로 치유하는 감동적인 책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언니가 4개월 만에 이메일을 보낸다. 반신반의하며 이메일에 달린 링크를 클릭하니 컴퓨터 화면에 가상의 파라다이스 소울 비치가 펼쳐지고 그 안에서 언니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진짜일까? 이것이 (소설 속에서) 진짜라면 장르는 판타지일 것이고, 누군가의 음모이거나 주인공의 착각이라면 스릴러일 것이다. 나는 판타지이기를 바랐지만 결국 작가가 우리를 배신하고 반전을 꾀하고 있음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어쩌면 반전의 반전이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만). 물론 죽은 사람과 가상으로 소통하는 것은 이미 현실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미국 국방부는 전사자의 얼굴과 목소리로 가상의 아바타를 만들어 가족과 온라인 대화를 나누게 하는 계획을 추진했으며, 이프아이다이IfIDie, 데드소셜DeadSocial, 리브스온LivesOn처럼 망자가 여전히 소셜 네트워크를 쓰고 있는 것처럼 (죽기 전에 작성해둔) 쪽지를 보내고 게시물을 올리는 앱도 나와 있다(루크 도멜, 『만물의 공식』, 반니, 2014 참고). 그래서 나는 소울 비치가 망자의 아바타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썼으며 초대받은 사용자만 접속할 수 있도록 어떤 보안 기능을 활용했는지 궁금했다. 소울 비치가 기술적으로 정말 가능하다면 나도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소울 비치는 죽은 자에게나 남은 자에게나 과연 축복일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의 원혼은 한이 풀리기 전까지 구천을 떠돈다는 말이 사실일까? 신원伸冤은 귀신을 위한 것일까, 사람을 위한 것일까? 주인공은 소울 비치에서 언니와 만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좀처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우리가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빈자리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없음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울 비치는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별의 치유 단계를 컴퓨터라는 매체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 주인공 아닌 사람이 소울 비치에 접속했다면 ‘그에게 보이는 풍경과 그가 만나는 사람’은 ‘주인공에게 보이는 풍경과 그가 만나는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을 입증할 수는 없다. 소울 비치의 작동 시스템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운영진이 있다는 것과 현실의 변화에 반응한다는 것뿐이다.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로맨스 문법에 충실한 묘사들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1등석의 호화로운 실내와 고급 서비스를 시시콜콜 설명하느라 지면을 낭비한다. 혹시나 대수롭지 않게 넘긴 묘사들 속에 사건의 열쇠가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끝까지 읽어보니 줄거리와 전혀 무관한 사족이었다. 그런데 동료 번역가에게 이래서 불만이라고 얘기했더니 그런 묘사야말로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환상적인 세상을 대리 경험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로맨스 소설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남자 주인공이 아직까지 여자를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하고 컴퓨터에만 빠져 지내는 ‘너드’로 설정된 것이 반가웠는데 역시나 숨겨진 매력이 하나하나 드러나더니 마지막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완벽한 남자로 변신한다. 친숙함이 위화감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정확한 장르는 하이틴 로맨스 독자를 겨냥한 판타지 스릴러로 해두자.

하긴 로맨스와 스릴러는 잘 어울리는 장르인 듯하다. 판타지야 당연히 로맨스의 전제이지만, 범인 찾는 일을 도와주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주의 목숨을 구해주는 남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니까. 그렇다면 로맨스와 스릴러가 합쳐진 소설은 결말이 뻔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자신의 장르를 숨긴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로맨스 소설은 현실 로맨스의 대체재일까, 보완재일까? 로맨스 소설은 미래의 로맨스에 도움이 될까, 방해가 될까? 여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남자 주인공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좌절할 테니 말이다. 연애의 기술을 배울 수도 없다. 남자 주인공은 애초에 ‘기술’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 아니던가. 말하자면 나는 로맨스 소설의 대상 독자가 아닌 것이다. 정 읽으려거든 중년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소녀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며 가능할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른 책으로 재도전해야겠다. 고등학생은 무리인 것 같으니 나이를 좀 올려서 20대 여성이 주인공인 로맨스 소설을 읽어볼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 호에.


출처: 《악스트》 2016년 3~4월 호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