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시점, 포르노의 시점

E. L. 제임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서평

노승영

고백컨대 나도 소싯적에 로맨스 좀 읽었다. 게다가 그 유명한 할리퀸 문고. 물론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2차 성징이 시작되던 시절, 야한 장면이 나오는 소설을 찾으려고 집 안 책꽂이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니까. (그때 함께 발견한 보물로는 일본 기업 소설과 삼국지가 있다. 비디오테이프는 빨리 감기 기능이 있었지만 책은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일일이 읽어야 했기에, 열 권짜리 삼국지를 두세 번은 통독한 것은 본의 아닌 소득이었다.) 말하자면 그때의 나에게 로맨스 소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나의 관심사와 무관한 패션, 인테리어,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 고급 승용차, 여주인공의 고민, 여자들의 수다 따위를 참아내면 입을 맞추거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위는 낮았고 장면은 짧았다. 욕구가 해소되기는커녕 감질나는 묘사에 찜찜하기만 했다. 이로 인한 배신감은 훗날 내가 로맨스에 편견을 가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다 30년 만에 어린 시절의 한을 풀어줄 작품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로맨스와 포르노를 버무려 전 세계에서 1억 2500만 부 넘게 팔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다.

‘포르노’의 조작적 정의(사회 조사를 할 때에 사물 또는 현상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기술하는 정의. 대개는 수량화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진다)는 ‘보면서 자위自慰할 수 있는 가능한 작품’이지만, 가장 유명한 정의는 포터 스튜어트 판사의 ‘보면 안다I know it when I see it’일 것이다. 이 책은 표지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는 만큼, 노골적 성애 묘사로 할리퀸 문고의 아쉬움을 달래줄 것 같았다. 과연 지금껏 읽은 어떤 도색 소설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수위가 높았다. 속독법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몇 페이지 걸러 한 번씩 주인공들이 섹스를 했으며 남자 주인공은 변태적 성욕의 소유자인지라 케이블 타이, 플로거(채찍의 일종), 구슬 등 온갖 소도구를 활용했다. 이만하면 포르노 동영상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아는 포르노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더니 혀로 배꼽을 핥았고 부드럽게 잘근잘근 물면서 조금씩 엉덩이뼈까지 내려갔다.” 이 책의 성애 묘사는 대체로 이런 식인데, 이 문장을 ‘느끼’려면 나의 엉덩이를 잡는 손길을 상상하거나 내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는 수밖에 없다(물론 이 경우에는 장르가 브로맨스로 바뀌어야겠지만). 하지만 나는 스물한 살의 여성 아나스타샤 스틸이 될 수 없다. 남은 대안은 남자 주인공인 스물일곱 살짜리 대기업 회장 크리스천 그레이이지만, 그의 시점을 취하는 순간 모든 감각 정보가 사라진다. 저자가 묘사하는 것은 아나스타샤의 새하얀 여체가 아니라 크리스천의 그리스 조각 같은 몸이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시각 자극과 청각 자극(영상의 경우)을 통해 관객을 흥분시키지만, 이 책에는 (적어도 남성의 관점에서는) 두 정보 다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인용 문장은 무미건조한 사실 진술에 불과하다. 이 시점에서 포르노의 정의를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성애 묘사’로 바꾸는 게 좋겠다. (같은 맥락에서 로맨스는 ‘옥시토신을 분비시키는 연애 묘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1인칭 여성 화자 시점은 포르노의 정의를 바꿔야 할 만큼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1인칭 여성 화자의 소설을 읽기 힘든 것처럼 여자들도 1인칭 남성 화자의 소설을 읽기 힘들까?’ 로맨스를 제외하면 1인칭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일 텐데 여자들은 그 많은 소설들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어쩌면 여성의 공감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1인칭 남성 화자 소설들을 읽으면서 길러질 것 아닐까? 남성이 디폴트 성性인 사회에서는 남성 화자를 무성無性의 인물로 착각하기 쉽지만, 로맨스처럼 성별에 따라 독법이 달라지는 소설에서는 화자의 성별이 뚜렷이 인식된다. 즉, 나는 지금까지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화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나―나와 성별이 같으므로―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와 성별이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나와 성별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여자 가수의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색했는데, 이제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럴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저자 E. L. 제임스는 이 소설을 남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한 『그레이』를 4년 만에 발표했다. (로맨스 장르에서는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을 채택한 속편을 출간하는 것이 드물지 않은 듯한데, 이것은 상대방의 머릿속을 알고 싶은 독자의 욕망에 부응한 결과일 것이다.) 『그레이』는 1인칭 남성 화자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전작前作(『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3부작 시리즈다)과 마찬가지로 쉽게 읽히지 않았다. 돈 많고 잘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 회장은 내가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추구하는 변태적 성행위는 나의 초자아가 개입하는 수위였다. (그런데 여성 독자들은 변태적 성행위를 ‘당하’는 것을 어떻게 경험했을까? 채찍으로 맞는 것이 상상 속에서 허락된다면 채찍으로 때리는 것 또한 상상 속에서 허락되는 것일까? 나의 초자아는 쓸데없이 개입한 것일까?) 그런데 E. L. 제임스가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그레이』를 썼다고 밝히고 있듯, 이 책 또한 대상 독자는 여성이다. 여성 독자가 그레이에게 이입했을 가능성은 내가 그럴 가능성보다 희박하다. 여성 독자들의 독법은 그레이의 내면을 ‘관찰’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애초에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나스타샤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를 관찰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레이가 꿈꾸고 실천하는) 변태적 욕망의 대상이 생각과 감정을 가진 존재이며 그의 욕망을 판단하고 수용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욕망은 옳고 그름도, 좋고 나쁨도 알지 못한다. 대상의 내면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 욕망에 가려져 있던,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악스트》 2016년 5~6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