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전직 소년병의 수기가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소년병을 주제로 한 책들이 국내에서도 여러 권 출간되었으며 자기 키만 한 총을 든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사람들은 소년병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접하며 함께 슬퍼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소년병 이야기에 깊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년병이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나의 안전이 위협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년병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소년병 현상의 맥락을 폭넓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 문제가 우리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의 배경인 시에라리온 내전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패한 정권, 권력 사유화, 외세의 개입, 지역(종족) 갈등, 이권(다이아몬드) 등을 만나게 된다. 소년병의 비극은 시에라리온 역사의 비극과 맞닿는다.
소년병의 가장 큰 비극은 어느 순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반군의 손에 부모를 잃고 납치되어 적에게 끌려간 아이들은 마약, 세뇌, 반군 내부의 권력관계 등을 겪으며 자신 또한 서슴없이 만행을 저지르는 반군으로 바뀌어간다. 소년병을 세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야 전투에서 적을 가차없이 학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시도 아니면서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는 무엇을 대비하려는 것일까?)
소년병은 괴물일까?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질을 하거나 손목과 팔꿈치를 잘라내거나 고통을 증가시키려고 일부러 날이 무딘 칼을 쓰는 순간은 괴물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군에게 납치되기 전까지만 해도 천사 같은 아이들 아니던가? 인간 아닌 괴물이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두려운 사실은 누구나 이런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을 모조리 죽이거나 감옥에 넣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괴물로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단순한 피해자도, 단순한 가해자도 아니었다. 상관의 위협에 마지못해 복종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견디고 저항했다. 가장 큰 저항은 인간성을 간직하는 것이었으리라. 소녀들의 연대도 남성적 폭력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반군 내에서는 성차별이 극단으로 치달아 여자들은 늘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자신을 지키려면 여자들끼리 뭉치거나 힘(총)을 얻거나 권력관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반군의 페르소나를 쓰기도 했다. 자신의 참모습은 전쟁 전의 과거에 남겨둔 채. 이렇듯 아이들은 환경과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소년병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파악할 수 없다.
반군은 납치된 아이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만에 하나 탈출하더라도 정부군에게 살해당하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년병이었다는 낙인, 사람을 죽였다는 낙인, 괴물이었다는 낙인이 아이들의 삶을 짓눌렀다. 하지만 쉽게 용서를 말할 수는 없다. 자기 부모를 죽인 소년병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전역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시에라리온 소년병의 사회복귀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과거에서 벗어날 계기가 필요했다. 어떤 마을은 주술을 동원하여 전직 소년병을 새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어디 시에라리온에만 있겠는가?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독재와 민주화 운동 등을 거치면서 우리도 숱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지 않았던가. 책을 덮는 순간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된다.